가장 아름다운 상속…돈보다 ‘나눔 DNA’ 물려준다
[나눔꽃 캠페인] 나누는 삶 함께하는 세상 ⑦ 유산 나눔
이승준 기자 박종식 기자
» 김춘희씨가 지난해 경복궁에서 휠체어를 탄 채 자원봉
사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김씨는 2005년 1
월 유산을 기부하기로 결정한 뒤 지난 2월 세상을 뜨면서
전세보증금 전액인 1500만원을 장애아동과 독거노인들
을 위해 기부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살아 있을 때 유산의 사용처를 미리 결정하기란 쉽지 않다. 유언장 작성이 일반화돼 있지 않고, 상속문화에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 ‘유산나눔’은 아직 낯설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자신이 죽은 뒤 유산을 사회에 내놓겠다는 뜻을 밝히는 이들이 늘고 있다. 사회에 ‘나눔’을 물려주는 일은 이제 더는 외국이나 거액의 자산가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죽거든 재산은 사회에” 확산
기초수급자 전세금 내놓기도
기부보험 등 적은돈도 가능
“결정 뒤 오히려 마음 편안”
■ 홀가분한 나눔 지난 7일 찾아간 박노주(79)씨의 단칸 전셋방은 소박했다. 박씨가 홀로 사는 방에는 손때 묻은 밥솥과 구형 텔레비전, 낡은 장롱 등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만 자리잡고 있었다.
서울 영등포시장 안의 한 상가 건물 3층에 있는 단칸방의 전세보증금은 2500만원. 박씨는 2년 전 이날, 전세보증금 가운데 1000만원은 조카에게, 나머지 1500만원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유산으로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2000년 사기를 당해 돈을 날린데다 1995년에 심장수술, 2001년에는 갑상선 종양수술로 가진 돈을 거의 써버린 박씨는 2006년 조카에게 500만원을 빌려 지금의 방을 가까스로 마련했다. 몸이 아파 일을 하지 못하는 박씨에게 전셋집은 정부가 빈곤층에게 매달 지급하는 기초생활급여 37만원을 빼면 유일한 재산이다.
박씨는 “그동안 나랏돈을 받아왔는데 나보다 어려운 분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도리”라고 말했다. 그는 “기부를 결정한 뒤로 마음이 홀가분하다”며 “돈이 없어서 배를 곯거나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에게 쓰였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박씨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2005년부터 시작한 ‘행복한 유산 캠페인’에 참여한 13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2005년 1월 이 캠페인에 처음으로 참여한 김춘희씨는 지난 2월 세상을 뜨면서 전세보증금 전액인 1500만원을 장애아동과 독거노인들을 위해 남겼다.
» 박노주(79)씨가 지난 7일 서울 영등포시장 안에 있는 자신의 전세방에서 옛날 사진을 보며 젊은 시절이야기를 하고 있다. 박씨는 2008년 전세보증금 2500만원 가운데 1500만원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유산으로 기부하기로 결정했다.
■ 50살의 결심 “25살까지는 공부를, 50살까지는 꿈을 이루고, 50살 넘어서는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
서울에서 한방병원을 운영하는 ㅇ(52)씨는 젊은 시절 책에서 봤던 이 구절을 늘 마음에 새기고 살아왔다. 실제 50살이 되던 2007년, 그는 마음에 품어온 대로 나눔을 결심했다. 그해 은혼식에 쓰려던 500여만원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한 데 이어, 병원 이름을 딴 기금을 만들어 한 달에 70만~80만원씩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한약재를 팔 때마다 1개에 1000원씩 적립하고, 병원에서 바자회를 열어 기금을 충당하기도 했다. 그는 이제 유산나눔을 고민하고 있다.
“2~3년 뒤면 두 아들도 독립할 텐데,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어떻게 나눌지 생각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그는 “나눔도 상속인 것 같다”며 “가족들을 설득해 유산의 일정 부분을 기부하려고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 엄마의 선물 유산나눔은 적은 돈으로 가족이 함께 실천할 수도 있다. 국제구호단체인 월드비전을 통해 국외아동을 후원하던 구정자(47)씨는 방송을 통해 식수난을 겪고 있는 아프리카의 우물 파기 지원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구씨는 월드비전을 통해 지난 1월부터 매달 3만8400원을 내는 종신기부보험에 가입했다. 구씨가 숨질 경우 3000만원의 보험금이 우물파기 사업에 쓰이게 된다. 구씨는 이 돈을 자신과 직장에 다니는 아들, 딸의 이름으로 각각 1개씩 모두 3개의 우물을 파는 데 썼으면 좋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는 “나눔을 결정한 뒤 마음이 편안하고, 언제 죽어도 행복할 것 같다”며 “자식들이 모든 일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눔을 선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 유산기부는 이렇게
가족동의 미리 구해야
» 유산기부 절차
김아무개(79)씨는 5년 전 ‘아무리 아껴도 죽을 때는 1000원짜리 한 장도 못 가져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씨는 자신이 숨진 뒤 재산의 일부를 기부하겠다는 뜻을 아름다운재단에 밝혔다. 그가 유산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를 거쳐야 했다.
먼저 유언장을 작성했다. 유언장에는 자신의 재산목록과 함께 이 재산을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기부할 것인지를 적었다. 김씨는 “잘 먹지 못하는 저소득층이나 장애인들에게 돈이 쓰였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다. 유언장이 완성되자 증인 2명을 참석시킨 가운데 공증인 앞에서 유언의 취지를 밝히고 법률사무소에서 공증을 받았다. 증인으로는 평소 다니던 성당 사람들을 선택했다.
유언장을 쓴 뒤에는 성당의 신부님을 유언집행인으로 지정했다. 유언집행인은 상속 기간에 고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유언 내용을 집행하는 구실을 한다. 김씨는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법적인 절차를 거쳐 마음이 놓인다”고 했다.
하지만 김씨는 유일한 혈육인 조카가 걱정이다. 김씨는 “조카가 섭섭해할 수도 있지만 이해해 줄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유산 기부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가족의 동의가 중요하다. 한태윤 아름다운재단 간사는 “유산기부를 하려면 무엇보다 가족의 동의가 필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상속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유산을 둘러싼 법적 다툼을 막으려면 유산기부를 결심한 뒤 변호사 등에게 법률자문을 구하는 것도 필요하다. 아름다운재단,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 나눔 관련 단체에선 유산나눔을 결심한 사람들을 위해 법적인 자문과 함께 유언장 공증 등의 절차에 대해 도움을 주고 있다. 이승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