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죽음’의 그늘에 복음·치유의 빛을 비추다 혐오와 공포의 대상, 온갖 무서운 소문들이 낙인처럼 따라다니며 돌팔매와 욕질을 당했던 이들. 바로 한센병(나병) 환자들이었다. 1960년대 한센병에 대한 인식은 아주 가혹했다. 한센병을 앓다 깨끗이 치유되어도 그동안 사회에서 누렸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저 정처 없는 걸인사회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센병 환자들은 부모로부터도 버림받았고, 아내나 남편, 친형제와 자식에게조차 외면받았기에 ‘살아있는 죽음’이라고 불렸다. 이렇게 병들고 지친 한센병 이웃을 돌보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달은 자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로 내 마음도 아프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던 월드비전 설립자 밥 피어스 목사는 52년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향한 곳,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구호사역을 시작했다. “우리는 이미 한센병 환자를 도울 건물을 지을 땅을 구해 놓았고 이달(11월)에 대전에서 한센병 환자의 영아들을 위한 집을 운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돌보고 있는 여자 한센병 환자는 55명입니다. 그들은 병을 가진 몸으로 이 영아들에게 젖을 먹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찾아와서 아직 감염되지 않은 이 어린아이들을 격리시켜 남들처럼 건강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해 달라는 간청을 해 왔습니다. 일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여기 찾아올 다른 아이들도 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피어스가 미국 후원자들에게 정기적으로 보냈던 편지 중. 1952. 11. 1) 월드비전이 한센병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게 된 것은 이들의 이러한 몸과 마음의 병을 치료할 뿐 아니라 그들의 미감아(한센병 환자 자녀로 감염되지 않은 어린 자녀)를 보호하자는 것이었다. 또 이들의 사회적 진출을 마련해 주는 ‘음성 한센병 환자 정착촌’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음의 빛을 안겨줘 새로운 삶의 세계로 이끌어 주려는 것이었다. 월드비전의 한센병 사역이 체계화된 것은 59년, 연세대 의대 교수였던 유준 박사와 협력해 선명회 특수피부진료소와 나병연구소를 개설하면서부터다. 한국에서는 그때까지 한센병 환자의 강제수용법이 법적으로 유효했고 일반 외래치료가 금지돼 있는 상태였다. 유 박사는 “나환자는 죄인이 아니다. 나병은 불치병이 아니다. 나환자도 환자다. 인간이다. 시민이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다. 그러니 병든 인간으로서, 병든 시민으로서 누구나 치료와 간호를 받을 권리가 있어야 한다”고 외쳤다. 특수피부진료소는 한센병 환자의 재가치료를 위한 우리나라 첫 공인기관이었다. 55년부터 92년까지 약 3884명의 새로운 한센병 환자가 등록돼 무상으로 치료를 받았고, 한센병 환자의 자녀와 접촉자에게 정기검사 및 예방처치를 해주었다. 또 월드비전은 소득증대사업, 환경개선사업, 교육훈련사업, 건강관리사업, 선교사업 등을 지원하는 ‘한센병 정착촌개발사업’을 통해 한센병을 치유했더라도 쉽게 사회활동을 할 수 없었던 이들에게 보다 안정적인 생계대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한센병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없애고, 올바른 지식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63년 2월부터 ‘새빛’이라는 한센병 계몽지를 발행했다. 이 잡지는 전국의 정부기관이나 보건소, 각 도서관, 학교, 한센병사업 단체, 의료기관, 한센병정착마을 등에 무료 배포됐다. 이러한 적극적 계몽활동으로 한센병 환자들의 인권을 옹호함으로써 한센병의 예방과 근본적인 퇴치에 힘을 실었다. 이처럼 60년대 사회적 약자였던 한센병 환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월드비전은 오늘날에도 인간답지 못한 환경 속 현실에서 절망하는 이웃들이 빈곤의 함정에서 벗어나 발전의 사다리에 올라설 수 있도록 다양한 옹호사업을 펼치고 있다. 가난의 원인이 되는 불평등한 구조의 제도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물론 더 많은 시민들의 인식을 변화시키고자 계속 노력하고 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